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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30

4월의 마지막 날.
내가 그토록 담임을 쉬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에게 내어줄 것 없이 고갈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찌꺼기를 비워내고 그 안에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 다시 나눠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담임을 쉬고 소속감 없이 아이들과 거리를 두는 생활을 하다보니 나의 존재의미가 다소 희미해지면서 접촉 불량인 충전기처럼 끝내 완충되지 못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지쳐있는 나의 정서 상태로는 아이들을 예전처럼 가까이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만나게 되지도 않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태. 나를 채우는 방법을 고민해 볼 일이다.

중봄 두 번째 연수가 있었고 '교사와 학생이 행복한 학급운영'이라는 주제로 내가 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7년 간 담임을 하며 갖고 있던 자료를 알록달록 편집하고 발표할 내용도 자료에 메모해가며 나름의 준비를 해 갔는데, 예상보다는 내게 주어진 임무가 그다지 막중한 것이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준비해 간 자료가 좀 과해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큰 줄기의 얘기 위주로 나의 경험과 생각을 발표했는데, 옆자리 Y쌤이 나의 담임 자료가 대단하다면서도 옆반 담임이 힘들었겠다는 얘기를 사족처럼 붙여, 끝내 마음이 또 쓰이고 말았다. 한동안 누구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는데, 요즘은 교장 눈치, 교감 눈치, 다른 동료 교사 눈치, 애들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다. 여유가 생겨서 그런 건지, 심리적으로 허약해져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다.

몇 가지를 사러 학교 근처의 생활용품 상점으로 갔는데, 사려고 했던 도마꽂이와 티스푼 외에도 러그를 세일해 팔길래 결국 또 사오고 말았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 옆에 깔아보니 방바닥에 비해 러그의 사이즈가 너무 작아 볼품없고 우스워보였다. 약간 들뜨고 침착하지 못한 상태로 했던 쇼핑의 여파인지 부엌에 도마꽂이를 두려고 뭘 건드리다가 엄지 손톱 옆이 길게 베였다. 긴 시간의 지혈이 필요할 정도로 피가 꽤 많이 나왔는데, 혼자 살아서 그런가 크게 다친 게 아닌데도 서럽고 아픔에 비교적 둔한 편인데도 평소보다 많이 아프게 느껴졌다. 설상가상 벽시계를 걸려고 지난 번에 가려두었던 못자국에 다시 못을 박아보는데 맞는 길이의 못이 없어 짧은 못을 억지로 박으려 해서 그런가 벽의 가루만 떨어질 뿐 못은 전혀 박히지 않았다. 떨어지던 것 중의 일부가 밑에 있던 공기청정기 속으로 들어가 또 짜증이 났는데, 그걸 빼려고 공기청정기를 분해하고 집게를 가져오고 별 생쇼를 다 했지만 결국엔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저녁에 먹으려고 고등어를 굽고 있었는데 중간점검을 하려고 아무 생각 없이 오븐 문을 열었다가 베였던 손을 다시 살짝 데였다. 아, 이런....이 모든 게 허둥지둥거리며 쇼핑하고 돌아와 덤벙거리던 내 탓인 것 같아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노력해 벌려 두었던 물건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고 조심 조심 밥을 차려 식사를 했다.

화장실 타일과 욕조 군데 군데에 끼어 있는 곰팡이가 못내 눈에 밟혀 어제 사온 실리콘 작업을 시작했는데, 실리콘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피어있는 곰팡이와 뒤섞여 있는 기존의 실리콘을 떼어내는 게 시급해보여, 자와 칼을 동원해 긁어내고 떼어냈다. 사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쁘지만 타일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럽고 기분은 더 더러워진다. 순백의 위생적이고 깔끔한 욕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락스로 칠갑을 해 소독을 좀 하기로 했다.
집안일도 많이 남았고, 내일 모레 집들이를 위해 정리도 더 해야 하고, 일기도 써야 하고, 공부와 독서도 해야 하고, 오늘 발표했던 중봄 자료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니 마음이 너무 너무 바빴지만 그래도 느즈막히 헬스장에 갔다. 헬스장을 평일에 가보니 더더욱 비좁고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인간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존재이므로 표준적인 인간으로서의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20분 자전거를 타고 35분 정도 러닝머신을 한 후 돌아왔다.

피곤하다. 내일 쉬고 싶지만 학생은 근로자가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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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5월이다. 돌이켜보면 내게 4월은 늘 뜻하지 않게 잔인했고 미칠 것 같은 분홍빛과 세계를 삼킬 것 같은 회색이 뒤섞여 묘한 불안정과 우울을 만들어내는 계절이었다. 숫자 하나 바뀌었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어쨌거나 시간은 간다. 힘든 일도 지나갈 것이고, 모든 것은 결국 받아들여질 것이다. 월요일의 상담 이후로 (사실 그 전에도 이따금) 떠올리게 되는 생각이 있다. 내가 동경하고 존경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대상들은 왜 모두 남자였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 멋지고 롤모델로 삼고 싶은 여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L교감이라든가, 학창시절의 여러 선생님들. 지금 현장에서 만나는 동료들 중에도 가끔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내 영혼에 울림을 주는 대상까지는 결코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해내지 못하는 아버지 밑에서 그것을 대리하고 위안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수업도 영상으로 대체한 주제에 오후가 되면서 급격히 피곤해지고 방과후수업도 너무나 하기가 싫었다. 집에 돌아오니 운동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내일의 집들이를 위해 청소할 일도 문득 귀찮게 느껴졌지만, 힘을 내어 오늘도 내 일상을 열심히 마무리했다. 언젠가 이 공간과 이 공간 속에 혼자 있는 나의 일상이 더 익숙하고 편안해지면, 충분히 이완하고 늘어지는 날도 오겠지.

20190502

학교쌤 세 명을 초대해 집들이를 했다. 나이로 봐도, 유일하게 비담임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봐도, 내가 그들과 완전하게 함께 어울리기에는 다소 애매하다는 점이 늘 마음 한 켠에 걸려 있다. 게다가 직장 동료를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고 일반적으로도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복적인 갈등과 고민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재밌고 무탈했던 집들이를 마무리하니 피곤하고 역시나 또 공허한 마음도 느껴진다. 내일은 대만 친구 푸셩이를 만날 것 같다. 갑작스레 한국에 오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올 때, 부담스러우면서도 만나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하게 가끔이나마 SNS상으로 늘 안부를 묻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는 다정한 동생이 타국에 왔고 그 곳에 내가 있는데, 부담스럽다(경제적으로, 언어적으로)는 이유로 피해서는 안된다는 의무감 같은 것. 일백프로 일만프로 흡족하고 기꺼운 것은 아닌 만남과 모임이 이어지는 와중에 내가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어떤 만남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사의 여파로 겪는 일시적인 경제적 불안정성과, 환경의 변화와 그간 누적된 피로로 인해 지치고 긴장도 되고 있는 정서 상태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다음 주에 있을 P부장님, K쌤, K부장님과의 만남은 그런 부담감이 좀 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일도 해야 할 일이 많고, 챙길 일도 많아 마음이 바쁘다. 돈을 융통해 달라는 언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는데, 마음이 이래 저래 좋지가 않다.

[찬감다행] 20190430

1. 학급운영에 대해서 멋진 자료를 공유하고 열심히 준비해 발표한 것을 칭 찬 해, 수고하고 고생했어! 2. 중봄에서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주신 걸 감 사해. 3. 독립 생활의 이러저러한 면에 대해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다 행이야. 4. 운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밤바람을 맞으며 기분이 좋고 행 복했어. 5. 아침에 교문지도 하는 날임에도 미리 가서 공부하고, 피곤하고 할 일이 많은데도 운동과 일기를 거르지 않은 나를 많이 많이 칭 찬 하고 격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