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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긴 연휴가 끝났다. 4일의 휴가 기간 동안 여러 계획을 세워두었는데, 건강검진만이 온전히 실행에 성공했고, 산부인과 검진과 목욕가기, 푸셩이 만나기는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해내지 못했으며, 운동은 절반만 했다. 본가에 가 있는 3일 반의 시간 중에 이틀은 거의 누워지내며 먹고자고 먹고자고를 반복했다.  어찌나 무위도식했는지, 오죽하면 오른쪽 눈의 쌍꺼풀 라인이 무너지고 서너개의 짙은 줄이 생겼다.
독립 3주차에 접어든 시점에 본가에 가보니 역시나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가에 가면 한없이 늘어지고 배고프지 않아도 끊임없이 뭔가를 먹게 되는데, 이건 긴장이 느슨해지고 이완되어 편안히 휴식을 취한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뭔가 공허감을 더 느끼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다른 집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으나, 집에 가보아도 딱히 길게 나눌 얘기가 별로 없고 그나마 나-엄마 혹은 나-아빠 간의 대화가 이루어질 뿐 나-엄마-아빠 삼자가 원활히 오가는 대화란 건 전무하다.
요즘 온갖 것이 지루하고 재미없고 지겨운 '인생권태기'이기 때문에 본가에서의 그런 모습이 더더욱 우울하고 공허하게 인식되어 울적했다. H의 툭툭 던져오는 발랄한 질문들이 -속좁게도- 철없는 부잣집 공주님처럼만 느껴져 답하기 싫어졌다. 예를 들어 본가에 가니 좋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속으로 울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독립해 나온 집에서도 따뜻함이나 충만함을 느낄 수 없고,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가더라도 소속감이나 포근함을 느끼지 못해, 어디에서나 이방인 신세인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부모와 내게 주어진 세계를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니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애쓰며 산다. 내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지어나가보려고 독립해 나온 이 곳에서 또다른 외로움과 공허, 고독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것 역시 내게 주어진 과제이자 숙명이라 생각하고 내 일상과 잘 섞고 배합해 예쁘게 빚어보려 한다.

연휴 끝의 출근이 괴로웠지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세 시간 뿐이었던 화요일 수업 시간표와 퇴근 후에 예정되어 있는 H중 쌤들과의 모임 덕분이었다. 몇 달 사이에 더 늙으신 P부장님과 피곤해 보이는 K쌤, 여전한 모습의 K부장님과의 만남에서 담임의 어려움을 듣고,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듣다가, 슬쩍 인생권태기에 빠진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이 슬럼프와 권태는 다음 도약을 위한 움츠림이 될 수 있으며, 그건 내가 결정한다는 걸.  학교에 들어와 7년 간 가진 능력 이상으로 달려왔고, 30년 넘게 살아온 인생에서는 늘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것을 뛰어넘고 극복하려 노력하고 애써왔다.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보상과 댓가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가성비가 좋은 편이었다고는 할 수가 없다. 지금 나에게 슬럼프가 왔다면, 나를 잘 다독이고 어루만지고 쉼을 제공할 때라는 뜻일 게다. 쉬어가야 또 살아가니까. 쉼 이후에 다시 힘을 내어 달릴 수 있을 때엔 조금 더 노련하고 현명한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운동을 했고 자기 전 이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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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5월이다. 돌이켜보면 내게 4월은 늘 뜻하지 않게 잔인했고 미칠 것 같은 분홍빛과 세계를 삼킬 것 같은 회색이 뒤섞여 묘한 불안정과 우울을 만들어내는 계절이었다. 숫자 하나 바뀌었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어쨌거나 시간은 간다. 힘든 일도 지나갈 것이고, 모든 것은 결국 받아들여질 것이다. 월요일의 상담 이후로 (사실 그 전에도 이따금) 떠올리게 되는 생각이 있다. 내가 동경하고 존경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대상들은 왜 모두 남자였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 멋지고 롤모델로 삼고 싶은 여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L교감이라든가, 학창시절의 여러 선생님들. 지금 현장에서 만나는 동료들 중에도 가끔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내 영혼에 울림을 주는 대상까지는 결코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해내지 못하는 아버지 밑에서 그것을 대리하고 위안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수업도 영상으로 대체한 주제에 오후가 되면서 급격히 피곤해지고 방과후수업도 너무나 하기가 싫었다. 집에 돌아오니 운동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내일의 집들이를 위해 청소할 일도 문득 귀찮게 느껴졌지만, 힘을 내어 오늘도 내 일상을 열심히 마무리했다. 언젠가 이 공간과 이 공간 속에 혼자 있는 나의 일상이 더 익숙하고 편안해지면, 충분히 이완하고 늘어지는 날도 오겠지.

20190502

학교쌤 세 명을 초대해 집들이를 했다. 나이로 봐도, 유일하게 비담임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봐도, 내가 그들과 완전하게 함께 어울리기에는 다소 애매하다는 점이 늘 마음 한 켠에 걸려 있다. 게다가 직장 동료를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고 일반적으로도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복적인 갈등과 고민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재밌고 무탈했던 집들이를 마무리하니 피곤하고 역시나 또 공허한 마음도 느껴진다. 내일은 대만 친구 푸셩이를 만날 것 같다. 갑작스레 한국에 오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올 때, 부담스러우면서도 만나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하게 가끔이나마 SNS상으로 늘 안부를 묻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는 다정한 동생이 타국에 왔고 그 곳에 내가 있는데, 부담스럽다(경제적으로, 언어적으로)는 이유로 피해서는 안된다는 의무감 같은 것. 일백프로 일만프로 흡족하고 기꺼운 것은 아닌 만남과 모임이 이어지는 와중에 내가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어떤 만남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사의 여파로 겪는 일시적인 경제적 불안정성과, 환경의 변화와 그간 누적된 피로로 인해 지치고 긴장도 되고 있는 정서 상태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다음 주에 있을 P부장님, K쌤, K부장님과의 만남은 그런 부담감이 좀 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일도 해야 할 일이 많고, 챙길 일도 많아 마음이 바쁘다. 돈을 융통해 달라는 언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는데, 마음이 이래 저래 좋지가 않다.

[찬감다행] 20190430

1. 학급운영에 대해서 멋진 자료를 공유하고 열심히 준비해 발표한 것을 칭 찬 해, 수고하고 고생했어! 2. 중봄에서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주신 걸 감 사해. 3. 독립 생활의 이러저러한 면에 대해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다 행이야. 4. 운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밤바람을 맞으며 기분이 좋고 행 복했어. 5. 아침에 교문지도 하는 날임에도 미리 가서 공부하고, 피곤하고 할 일이 많은데도 운동과 일기를 거르지 않은 나를 많이 많이 칭 찬 하고 격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