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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7의 게시물 표시
1. 열병을 앓듯 달떠서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심신을 가누기 힘들었던 청춘의 계절이 내게도 있었다. 2.최초의  -성숙하고 진실한 의미에서의- 열병은 고1때 H쌤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와 같이 프레시맨이 되어 신규교사로 온 세 명의 총각교사 중에서도 작문 H쌤과 윤리 J쌤 두 분을 두고 여고생들은 저들끼리 우리 쌤이 낫네 너네 쌤이 어쩌네 하며 서로 편이 갈려 날마다 자신이 신봉하는 쌤을 쫓아 우르르 몰려다녔다. 부잣집 막내 도련님마냥 곱상하고 어여쁜 윤리쌤과 달리 H쌤은 눈과 입술의 비대칭과 지나치게 발달한 선귥은 하관이 눈에 띄고, 누구라도 당장 호되고 냉정하게 비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매서운, 스윗함이나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먼 타입의 쌤이었다. 작고도 평범한 일을 갖고 늘 반문하고 캐묻거나 비판해서 많은 아이들은 황당해하거나 당황해하거나 "왜 저래?"라는 듯한 다소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걸음은 느릿느릿 어깨가 굽어있었고 곧 땅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이 늘 땅을 응시하며 갇다가는 학생들이 인사라도 하면 친근한 '안녕'이 아니라 75도쯤 허리를 숙여 "안녕하십니까"라는 어색하고 거리감 느껴지게 하는 답례를 건네곤 했다.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학교 안에서 '작문파'는 기하급수적으로 자취를 감추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윤리파'로 노선을 선회했으나, H쌤에 대한 나의 동경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수업 시간에 던지는 작은 질문들,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비유와 사례 속에 녹아 있는 인생의 상징과 철학들에 나는 매번 전율과 희열을 느꼈다. 당시에 학교 선생님과 여고생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감우성, 채림 주연의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었고, 이 분위기에 힘입어 아이들은 더더욱 윤리쌤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일쑤였는데, 어쩐지 나는 내가 품고 있는 그 깊디 깊고 크디...

20170314

Y를 만나 밥먹고 영화 보고 돌아온 밤, 마음이 헛헛하고 가난하다. 급기야 그 이튿날인 오늘 새벽엔 하염없이 떠올린다, D와 함께였던 그 세계를. 그 품에 나른한 단잠을 자고 포옹 속에 자주 위로 받았던. 원없이 땡깡 피우고 어리광 부리고 짜증낼 수 있었던, 조금은 안전했던 세계. 비록 그 세계도 영원할 수 없어서 곧 종말을 맞이했지만- 다시 구제불능의 염세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 세계는 과거가 되었고, 혹여 과거가 아니라 나의 현재였다고 해도 봄꽃처럼 짧디 짧았으리라. 속이 찢어질듯 쓰리고 아프다.

20170304

1. 어제는 새 학교 새 반 아이들과의 첫만남이 있었다. 일주일 같은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불금으로 시작되는 주말이기도 해서 퇴근 이후로는 가급적 학교 생각을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불쑥 불쑥 잔걱정들이 떠오른다. 첫날부터 수다스러운 우리반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학생들 학업수준이 예상보다도 훨씬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수업해야 할까, H중에서 강전왔다는 아이가 우리반 D와 친하게 지내는 모양인데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학년부 체제에서 담임들끼리 합의하는 게 중요할 텐데 학급 활동은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 걸까, 아이들과 어느 정도까지 교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깜냥이 되는 사람인가.... 담임을 하면서 마음 편히 지내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허황된 꿈이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때가 얼른 다가오길 바랄 뿐. 2. 어젠 또 전임교 H중에 신규 발령난 동교과 Y쌤에게 연락이 왔다. 수업시수와 연구수업 문제를 놓고 K쌤과 마찰이 있다고 했다. K쌤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불끈 올라오는 분노인지 시기인지 원망인지 모를 미상의 감정이 떳떳하지 못하다. 이미 그 학교를 떠나 다른 곳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그 문제에 너무 깊이 말려들지 말자고 여러 번 되뇌였으나, 결국 또 얄미운 시누이처럼 속닥속닥 뒷담화에 대처방안까지 침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고 말았다. 이런 내 모습이 수치스럽다가도 한 편으로는 이다지도 날 것 그대로, 위선이나 가식 없이 -신데렐라 언니처럼 보이는 것을 감수해 가며- 내 감정을 누르지 않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스스로를 토닥여주고 격려해주고 싶기도 한 것이다. 3. 오늘 아침, 치과에 간다는 내 말에 엄마는 예의 그, 초등학생 때 치아교정 때문에 생긴 입 주변의 주름 모양이 얼마나 보기 싫은지, 그래서 필러 시술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설파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엄마의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난 너에게 관심이 많고,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더 예쁘고 훌륭하...